퇴근 인사를 하는데 팀장님이 물었습니다. "시킨 일 다 했어? 왜 벌써 가?" 그날 밤 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농담이고, 누군가에게는 며칠을 곱씹는 말입니다. 이 간격을 어디까지 '괴롭힘'으로 볼 것인가. 국제노동기구(ILO)의 제190호 '폭력과 괴롭힘 협약'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ILO는 UN 산하의 노동 전문기구이고, 비준은 '이 국제 약속을 우리나라 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최종 확인 절차입니다. 정부는 2025년 9월 국정과제에 'ILO 괴롭힘 방지 협약 비준 추진'을 담았고, 2026년 7월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직장 내 괴롭힘 제도 개선 분과위원회가 꾸려져 노사정이 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이야기가 구호에서 실무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법은 있는데, 괴롭힘은 줄었을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기억하시나요? 정확히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2(금지)와 제76조의3(발생 시 조치)입니다. 2019년 7월부터 시행되어 올해로 7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 우리가 일하는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괴롭힘은 뿌리째 뽑혔을까요. 이 글을 읽는 분도, 쓰는 저도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법이 있어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피해자에게는 없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협약이 넓히는 네 가지
2019년 ILO 총회에서 채택된 190호 협약은 일터의 폭력과 괴롭힘에 대한 최초의 국제 기준입니다. 핵심은 네 가지입니다. ① 괴롭힘의 정의를 넓히고, ② 보호 대상을 넓히고, ③ 적용 장소를 넓히고, ④ 가정폭력이 일에 미치는 영향까지 인정합니다.
먼저 정의입니다. 협약은 신체적·심리적·성적·경제적 해를 노리거나, 일으키거나,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행위와 관행,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겠다는 위협까지 폭력과 괴롭힘으로 봅니다. 한 번이든 반복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의도가 아니라 결과와 가능성을 봅니다.
"장난이었어"
처음의 그 한마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고하기로 약속한 날은 이틀 뒤인 금요일이었고, 저는 마감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퇴근하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지 않는 것은, 조직문화가 지금보다 덜 성숙했던 그때에도 상식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팀장님께 회의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어제 그 말이 서운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돌아온 답은 "장난이었다, 상처받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조심하겠다"였습니다.
그 뒤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그때 제가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저 자신의 용기 하나뿐이었습니다. 개인의 용기에 기대는 해결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말한 사람만 지치고, 다음 사람은 또 처음부터 같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장난이었다'는 말은 의도를 설명할 뿐, 상처를 지우지는 못합니다.
190호 협약이 의도보다 결과와 가능성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괴롭힘은 피해자 쪽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근로기준법은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했는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었는가'를 따져야 해서,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일이 괴롭힘인지부터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단 기준을 피해 쪽으로 조금 더 옮기는 것은,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고객도, 회식 자리도, 메신저도
협약은 보호 대상도 넓혔습니다. 계약 형태와 관계없이 일하는 모든 사람이 대상입니다. 플랫폼 노동자나 특수고용 노동자는 물론, 인턴과 견습생, 자원봉사자, 구직자와 지원자, 이미 고용이 끝난 사람까지 포함합니다.
장소도 사업장 안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출장과 이동 중, 교육과 회식 같은 업무 관련 행사, 출퇴근길, 그리고 사내 메신저와 이메일 같은 업무 관련 온라인 소통까지 들어갑니다.
가해자의 범위도 넓습니다. 동료와 상사뿐 아니라 고객, 거래처, 서비스 이용자, 일반 대중이 일으키는 폭력과 괴롭힘도 다룹니다. 협약이 국내법에 담기면 '손님은 왕'이라는 말을 방패 삼는 갑질은 설 자리가 줄어들 것입니다.
총무는 회사의 '바깥 사람'과 가장 많이 맞닿는 자리 중 하나입니다. 안내 데스크, 시설과 미화를 맡은 협력사 직원, 회사를 찾는 방문객. 이분들이 일터에서 겪는 무례도 결국 그 회사의 일입니다. 우리 직원만이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지키겠다는 것, 저는 이것이 협약이 말하는 '일의 세계'라고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협약은 가정폭력이 일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고, 정부와 사용자, 노동자 단체가 그 영향을 줄이도록 요구합니다. 가정폭력은 집 안의 일로 끝나지 않고 결근과 병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50여 개국은 했고, 한국은 아직
2019년 채택 이후 50개가 넘는 나라가 협약을 비준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이, 북유럽에서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비준했습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많은 나라도 함께했고, 아시아에서도 필리핀 같은 나라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반면 한국과 중국, 일본 동아시아 세 나라는 모두 아직입니다. 미국, 인도, 튀르키예도 비준하지 않았고, 의외로 스위스도 아직입니다. 동아시아의 경우 나이와 직급을 먼저 따지는 유교식 서열 문화가 일터에 깊이 자리 잡은 영향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경제 규모가 큰 나라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이라는 점은, 협약이 요구하는 법과 제도의 변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비준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한국이 협약을 비준하면 지금의 근로기준법만으로는 범위가 모자랍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 개정보다 별도의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도 나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사각지대가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지금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은 상시 5명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도 법의 바깥에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만큼은 사업장 규모나 계약 형태로 나눌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협약은 성별에 따른 폭력과 괴롭힘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합니다. 예방하고 대응할 제도의 바탕이 생기는 셈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손해만은 아닙니다. 재무 수치 밖의 가치를 함께 보는 ESG 평가에서 '사회(S)' 항목은 일하는 환경을 봅니다. 국제 기준에 맞춘 일터는 해외 투자자에게도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용이 걱정이라면
물론 우려도 있습니다. 기업들은 협약이 요구하는 예방 의무, 위험성 평가, 교육과 훈련이 경영의 자율성을 줄이고 비용을 늘린다고 말합니다. 근로기준법뿐 아니라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까지 손봐야 하니 입법의 부담도 큽니다.
그런데 총무의 눈으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저는 회사의 통제 절차를 전자결재 안에 하나씩 심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 설계할 때 품이 들 뿐, 한번 시스템으로 자리 잡으면 해마다 큰돈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신고 창구, 조사 절차, 정기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선의에 맡기지 않고 절차로 만들어 두면, 다음 사람은 용기 대신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사람의 용기에 맡기지 말고, 절차로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중소기업은 부담이 크니 예외를 두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조직일수록 보는 눈도, 기댈 절차도 적습니다. 억울한 일이 생겨도 말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예외로 둘 곳이 아니라 먼저 살펴야 할 곳입니다.
국제 기준이라는 지렛대
190호 협약 비준은 국제 기준을 따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로 가는 과정이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긴 과제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노사정의 대화가 그 첫 지렛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장난이었다'는 말이 더는 변명이 되지 않는 일터. 국제 기준은 그 일터를 향한 최소한의 약속입니다.
이 글은 2025년 9월 정부가 협약 비준을 국정과제에 담았을 때 처음 썼고, 2026년 7월 노사정 논의가 시작된 것에 맞춰 다시 다듬었습니다.